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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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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

(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후에 부친을 따라,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의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835년 말,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의 눈에 

띄어 15세의 나이로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최 토마스는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183612월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376월에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여, 그곳에 설립된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자, 마닐라로 피난 가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최 토마스는 1842년 마카오를 떠나, 입국로를 탐색하고자 남경을 거쳐 요동으로 갔다. 그는 1843년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고, 이 무렵 조국에 일어난 박해와 부모님과 다른 신자들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184412월 최 토마스는 신학 수업을 마치고 김 안드레아와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1848년까지 입국을 준비하고 있던 최 토마스 부제는 18494월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요동 지방으로 가서 본격적인 귀국을 시도하였다. 그해 12월 최 토마스 신부는 조선의 밀사 신자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최 토마스 신부가 귀국하였을 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후에, 주교가 됨)는 병이 나, 사목 방문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천여 리를 걸어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사목 활동은 11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 신부는 휴식 기간을 이용, 한문 교리서와 주요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글로 된 천주 가사를 작성하거나 기존에 있던 가사들을 정리하여 신자들에게 보급하였다. 그 이유는 성가 형태로 된 천주 가사들이 신부의 강론을 대신하기도 하고, 신자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 신부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다블뤼 신부가 세운 충북 진천의 배티 신학교에서 세 명의 소년을 가르치다가,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 순방 도중, 많은 어려움과 박해에 직면하여 목숨이 위태로웠다. 한 번은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체포되어 죽을 위험에 놓이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 겨울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반쯤 나체가 된 채 눈길을 헤매기도 하였다.

 

1860년 경상도 지역에서 경신박해를 만난 최 신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이렇게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드디어 육신의 힘이 고갈된 최 신부는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겹쳐, 18616월 문경읍(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40세의 나이로 선종했고, 그해 11월 초, 그의 유해는 제천 배론 신학교에 모셔졌다.

 

시복청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이다.

1996-1997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을 간행하며 시복 청원을 준비했으며,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작업을 통합 추진하기로 결의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안건도 함께 논의되기 시작했다. 2001년 주교회의는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주교회의가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 안건의 청구인이 되어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법정은 2005년 12월 3일의 첫 회기를 시작으로 4년간 13회 열렸으며종료 회기는 2009년 5월 20일에 있었다같은 해 6월 3주교회의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법정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다.

2009년 시복 문서를 접수한 교황청은 문서들을 면밀히 검토해 정리한 뒤시복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자료인 포지시오’(심문 요항)를 2014년 8월 23일 시성성에 제출했다교황청 시성성 역사위원회 심의는 2014년 11월 18시성성 신학위원회 심의는 2015년 12월 15성덕 심사의 최종 단계인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는 2016년 3월 14일에 열렸다.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라 하여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명단에서 제외되었다그 후에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불기 시작한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 최양업 신부와 124명의 순교자들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청원을 해놓은 상태이다.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 건이 같은 시기에 시복 추진을 시작한 순교자들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기적 심사’ 때문이다시복 시성에 관한 교황령(교황 요한 바오로 2, ‘완덕의 천상 스승’ 2조 5, 1983.1.25.)과 교황청 시성성 지침(‘주교들이 행할 예비 심사에서 지킬 규칙’ 32-34, 1983.2.7.)에 따르면증거자의 시복 조사에는 기적 심사를 하게 되어 있다순교자는 순교 자체를 기적으로 보아 기적 심사가 면제된다.

 

한국 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닌증거자의 시복을 추진한 것은 최양업 신부가 처음이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의 경우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순교 사실을 인정받은 뒤 바로 시복이 결정됐기 때문에 기적 심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증거자는 기적 1건이 입증돼야 복자품에 오를 수 있습니다따라서 최양업 신부에 대한 기적 심사는 한국 교회가 실시한 최초의 기적 심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경자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2016년 5월 8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준을 받아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2009년 교황청에 시복 문서 제출한 지 7년 만이다이제 기적 심사 통과하면 시복이 됩니다한국 천주교회가 시복을 추진 중인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의 시복 안건이 2016년 3월 14일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를 통해 교황청 시성성의 성덕 심사를 통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6년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을 접견하시고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heroic virtue)을 인정하는 시성성 교령을 승인하셨다이 소식은 바티칸 통신(VIS) 4월 27일자에 공표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로 선포됐다. ‘가경자란 교황청 시성성 시복 심사에서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하느님의 종에게 붙이는 존칭이다가경자로 선포된 증거자는 그의 전구(轉求, intercession: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간청하고 탄원하는 행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기적 심사를 통과하면 시복이 결정된다.

 

이제 남은 절차는 교황청 시성성의 기적 심사입니다시성성은 우선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제출한 심사 문서를 토대로 한국 교회 차원의 기적 심사가 교회법적 절차를 잘 따랐는지 확인합니다이후 시성성 의학전문가팀이 치유 기적이 현대 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인지를 검토합니다이 단계를 통과하면 시성성 신학위원회가 기적이 가경자의 성덕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확인합니다마지막으로 시성성 추기경위원회가 앞선 검토 내용을 바탕으로 기적 심사 판결을 내립니다최종적으로 교황이 추기경위원회의 판결을 인정하면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결정됩니다.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 총무 류한영 신부는 교황청 시성성 소속 의학전문가들이 매우 정밀하게 내용을 검토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절차를 앞두고 있다면서 정확한 마무리 시기를 알 순 없지만적어도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인 2021년엔 심사가 마무리돼 시복 결정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로 신앙을 증언한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 당대의 유일한 한국인 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해 조선 팔도를 누빈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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