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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의 친필 서한 14

 

지극히 공경하올 리브와 신부님께

 

어제 제가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서한을 드리면서 다 말씀드렸기 때문에, 신부님께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드린 말씀은 곧 신부님께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보낸 저의 서한을 신부님께서도 보낸 것으로 여기시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신부님이 18568월에 보내 주신 서한은 잘 받았습니다. 만일 신부님께서 가끔이라도 저에게 서한을 보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외로움과 적적함을 어떻게 달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들 어지간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베르뇌 주교님만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더 큰 병에 걸리시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시지나 않을까 하여 매우 걱정이 됩니다. 주교님은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이 일하시고, 당신의 목자 직무에 너무 골몰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듯 위대한 목자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주교님의 과감한 혁신과 건설로 교우들이 크게 고무되어 있으며 모든 이가 주교님을 다정한 마음으로 우러러 공경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주교님을 오래 장수케 하시면 조선 교회는 굉장한 발전을 이룩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존경하올 다블뤼 주교님께서는 조선 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프르티에 신() 신부님은 신학교 교장이시고, 페롱 신부님은 아직 말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으며, 매스트르 이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박() 신부님과 저, 이렇게 셋만이 베르뇌 주교님을 도와 신자들의 사목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직접 상관없고 주제넘는 사항을 신부님께 서한으로 말씀드린다는 것은, 저의 직분을 넘는 짓으로 보이고 더구나 비방을 말하는 것은 무분별한 짓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신부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부득이 진정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신부님께서도 이런 것을 아셔야 앞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겠고, 또 다른 분들에게도 유용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베르뇌 주교님의 선임자이신 페레올 고()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모든 교우들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들만 사랑하시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만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이를 그대로 두면 주교님께도 해로울 것이고, 일반 교우들에게도 손해가 되겠기에 주교님께 여러 번 서한도 올리고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시라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저는 주교님한테 큰 꾸중만 들었고, 저들 복사들로부터는 큰 미움을 샀을 뿐이었습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 별세하시자 다시 신자들 사이에서 저들을 추방하자는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저들이 얼마 동안 매스트르 신부님한테 붙어 있다가 공개적인 물의를 일으켜서 결국에는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날이 더욱 큰 악표를 신자들에게 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우 행세도 못합니다.

 

우리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자들에 대한 여론을 말하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양반 자신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백성이 양반 계습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사회) 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함의 원인임을 시인하며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페레올)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도 높아져 있는 양반들을 더 높이 추겨 주고, 그 반면에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일반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또한 교우들의 열심이 나날이 감퇴되어 가고 악한 사정이 더욱더 악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신부님께 드리는 이유는 신부님께서 우리 조선 백성의 정신 상태와 현실정과 풍속을 미리 완전히 파악해 두시고, 장차 조선으로 파견되는 모든 선교사 신부님들에게 이런 지식을 미리 넣어 주는 것이 무익하지 아니하리라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선교사들이 이러한 정보를 미리 제공받지 못한 채 조선에 오게 되면, 자기의 측근에서 시중드는 복사들 말만 듣고 판단을 그르치거나 또는 그 밖의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과 신자들에게 많은 해를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저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기 의견이 풍부하리만큼 많은 일에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무방하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하기야 조선 백성의 사회 구조가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재 조선의 양반 제도는 일부 양반에게 모든 권리를 인정해 주어서 그들 자신만을 위하여 남용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반면에 일반 서민은 양반들의 온갖 부당한 횡포를 에누리 없이 당하도록 강요하는 제도입니다. 그리하여 교만한 양반들을 언제나 더욱 오만방자해지도록 부추기고, 비참한 백성들을 언제나 더욱 비참해지도록 내리누르는 것이 조선의 사회 구조입니다. 이러한 사회구조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하에서는 형제의 우애와 애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권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오로지 양반 계급만 치켜세우고 양반 계급이 아닌 일반 서민은 마치 내버려진 자처럼 억압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본래 부자와 세력가에게는 아부하고, 가난뱅이와 비천한 자들은 외면하고 뿌리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의 사회 제도는 인도의 브라만 신분 계급처럼 전혀 비합리적인 고질적 제도로 구성되어 있지는 아니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쉽사리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에게 동일한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외교인들 양반들 중에서도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은 현 양반 제도가 전적으로 나쁘다고 시인합니다. 이러한 양반 제도가 계속되는 한 조선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질적인 신분 차별은 쉽게 시정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높은 벼슬에 사람을 등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평가하여 등용한다면 양반 제도는 강제적인 노력이 없더라도 저절로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에 관한 말씀을 드리자면, 육신으로는 어지간히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만 정신적으로는 날마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옛 청춘의 활기를 몽땅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옛날에 신부님과 드 라 부뤼니에르 신부님 슬하에서 지내던 시절의 유쾌한 추억을 하루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해마다 몇 주간씩만이라도 옛날에 누렸던 대로 신부님 곁에서 지내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정신적으로 훨씬 젊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저와 저의 모든 궁핍을 알고 계시는 좋으신 신부님의 기도에 저를 거듭거듭 맡깁니다.

 

이제 그만 붓을 놓으면서, 성체의 형상 아래 숨어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 아래, 그리고 자비로운 옥좌 앞에서 또한 자애로우신 성모님과 함께 신부님의 기도를 바랍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제가 해마다 짧게나마 페낭에 있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저들이 한 장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서한이 중간에서 분실되거나 신학교 교장 신부님이 이 서한들을 가로채고 학생들에게 전해 주지 않지는 않았는지요? 저들의 마지막 서한을 보면 고독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그들이 여러 해 동안 저한테서 한 번도 위로의 서한을 받아 보지 못하였다고 저를 몹시 원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크게 언짢았습니다.

 

한가지 청을 드리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조선의 모든 교우들에게 줄만큼의 많은 묵주를 갖고 계시지는 못하실 줄 잘 압니다. 신부님께서 주실 수 없는 것을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부님께서 주실 마음이 있으시기만 하다면 주실 수 있는 것을 청합니다. 묵주를 견고하게 만드는 집게를 구하실 수 있다면 하나나 여러 개를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신부님께서는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를 조선 교우들에게 최대한으로 많이 선물하시는 셈이 되겠습니다.

 

또 할 수 있으면 묵주 만드는 금빛 나는 구리 철사를 많이 보내 주시면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붉은 색 나는 구리 철사를 만들 줄 밖에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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