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8월 12일 목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또는
[백]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시편 114(113 상)편
(113상)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곱 집안이 이상한 말을 하는 민족을 떠나올 때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왕국이 되었네.
바다가 보고 달아났으며
요르단이 뒤로 돌아섰네.
산들은 숫양들처럼,
언덕들은 어린양들처럼 껑충껑충 뛰었네.
바다야, 어찌 도망치느냐?
요르단아, 어찌 뒤로 돌아서느냐?
산들아, 너희가 숫양들처럼,
언덕들아, 너희가 어린양들처럼 껑충껑충 뛰다니?
땅아, 주님 앞에서 떨어라,
야곱의 하느님 앞에서.
그분께서는 바위를 못으로,
차돌을 물 솟는 샘으로 바꾸시네.
복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오늘의 묵상
베드로 사도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임금은 일만 탈렌트(1탈렌트=6천 데나리온)라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를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일당)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이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이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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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gt9qBW-S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