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와 유혹

by surisan posted Feb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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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유혹

                                       유경숙 멜라니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부인하라는 강요는 박해시대의 큰 유혹이었다. 매질과 흉기를 휘두르며 믿음을 위협했다. 배교를 선택하면 목숨은 보장되었지만 하느님을 선택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담배촌 사람들은 기꺼이 하느님을 선택하였다. 가족의 삶을 지켜줄 수 없는 안타까움에 연민이 꿈틀거려 그 처연함에 가슴이 아렸을 것이다. 인간적인 연민을 뒤로 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지 않았다면 순교의 길을 갈 수 없었다.
짧은 순간, 생사를 가르는 선택에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가족, 무난한 삶. 두려움에 떨며 수없이 갈등하였다. 이성례 마리아의 행적에도 갈등하는 자신을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단번에 순교의 길을 택하는 것도 축복일 수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떨까. 지금은 총이나 미사일을 코앞에 들이 밀며 배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아직도 종교의 자유를 박탈시킨 몇몇 나라가 있어 투쟁 중에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사소한 유혹이 대부분이다. 비가 오니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약속이 있어서, 산이 좋아서, 여행 중이므로...이런 유혹들은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사소한 핑계, 이유들이 신앙생활에 충분히 먹구름을 드리우게 만드는 요인이며 유혹이기도하다. 게다가 한 주 혹은 한 달, 그 이상 지속되어 영영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나도 가끔 사소한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처음 집을 나서는 어린아이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돌아 갈 집을 확인한다. 돌아가기에 알맞은 거리만큼 발짝을 뗀다. 그런 일이 잦아져 감각이 엷어지면 더 멀리 가게 되고 마침내 돌아 갈 집을 잃고 만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그렇다. 하느님 없이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데 뭘. 하느님은 한 번도 보지 않았기에 상징적 인물이 아닐까, 라는 의심도 하게 된다.

지금의 순교적 신앙은 이런 사소한 유혹을 뛰어 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순교자묘역을 돌아보며 그분들의 삶을 묵상하여 세상에 찌든 때를 벗겨내는 성찰이 필요하다.
딸들이 해외 출장을 가면서 주일이 끼어 있을 때가 있다. 낯선 곳에서 성당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게다가 언어도 다르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애들은 작은 성물을 내밀며 전화로 성당위치와 미사시간을 알아내어 미사 참례한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출장업무가 피곤해 늦잠을 자고도 싶었을 텐데. 다른 곳을 기웃거리느라 시간도 없었을 텐데도 미사참례를 거르지 않는 애들이 고맙기만 하다.

생명을 버리며 하느님을 택한 결단에 비하며 우리들의 유혹은 먼지보다도 작지만 그것마저 이겨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하기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며 성찰한다면 유혹에서 해방된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자식을 두고 순교를 한 이성례 마리아의 모성은 천상에서도 끊임없이 자식을 위한 기도를 하셨을 것이고 자식들은 아버지인 최경환성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순교의 빛을 퇴색시키지  않았다. 그분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수리산성지를 순례하면서 한층 깊어진 영성에 이르렀다는 순례자들의 체험담을 자주 듣게 된다. 최경환성인의 이끄심이 아닐지...